큰애의 논술 시험에 따라 갔다 겪은 얘기.
헬조선까지는 아니지만, 헐조선은 될 듯.
아침 9시반까지 입실, 10시분터 11시 40분까지 시험이라 여유있게 도착할 생각으로 집을 나선 것이 7시 반경.
전철역에 도착한 것은 8시 반.
시험장에 도착한 것은 8시 40분.
입실후 안내판에 있는 학부모 대기장소에 도착한 것은 8시 50분.
학내의 건물 대부분을 학부모가 출입하지 못하도록 제한을 했기 때문에 비바람을 막을 곳도, 화장실도 찾기 어려웠으니 그렇게 한 듯.
여기까지는 순조로웠다.
커피하나 대학소개책자 하나 받아들고 대형강의실 앞의 홀에서 홀짝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애한테서 전화가 왔다.
"코피가 나는데 지혈이 안돼요."
금방 간다고 전화를 끊고 나갔지만, 학부모와 수험생의 끊임없는 인파의 방향을 역행해서 빠르게 갈 수는 없었다.
다시 애한테서 전화가 왔다.
"지금 응급실인데, 아빠 어디예요."
시험장 앞으로 갔더니 중년의 직원이 병원 응급실로 갔다고 하면서 방향을 가르쳐준다.
가보니 대학병원까지 거리는 매우 가깝다.
응급실에서 문의를 하니 학생이 왔다고 확인해주지만, 보호자는 한명만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아마 메르스의 영향일 듯 하다.
들어가서 다시 문의하니 응급실 베드 한쪽에 애가 앉아 있다.
당연히 누군가 옆에 있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아무도 없다.
콧구멍에는 얼기설기 솜이 박혀있고, 코피는 멎은 듯했다.
피범벅이 된 손에는 피범벅이 된 휴지가 둘둘말려 있다.
두리번거리니 인턴이 온다. 이때가 9시 10분.
인턴: 솜으로 막았고, 관찰 후에 지혈이 확인되면 이비인후과에서 와서 확인하고, 필요하면소작술을 시행할 수 있으니 기다리세요.
애비: 9시 30분까지 시험장 입실을 해야하는데 가능합니까?
인턴: 그 때까지는 이비인후과 진료를 받을 수도 없습니다.
애비: 지금 가야하니, 솜과 아이스팩 좀 주세요.
인턴: 솜의 지혈제 성분은 금방 날아가니 소용없고, 아이스팩은 쓸모도 없지만, 드릴 수 있는게 없네요.
애비: ...........................
데리고 나오면서 수납을 하려니 이름이 등록되지 않았다고 기다리란다. 5분 경과.
그래서 애엄마보고 먼저 데려가라고 하고 수납을 했다.
대략 7만원 가까이 나왔다.
에피네프린 적신 솜뭉치 하나 넣고 10분동안 기다리는데 그정도다.
슬슬 빡치는 느낌이지만, 목마른 놈이 우물을 판다고 안으로 들어가서 간호사한테 솜이나 좀 달라고 다시 부탁을 했다.
얼음공주같은 눈으로 레이저를 쏘았지만, 인턴과는 달리 준비실로 가서 솜, 거즈 등을 준비해준다.
안에서는 소독된 것이 필요한지를 묻고 그러는 모양이었는데, 암튼 받은 세트는 포장이 뜯긴 것이었다.
다시 시험장에 가보니 애는 입실했고, 엄마만 남아있다. 9시 25분경.
직원한테 다시 얘기를 하니 바로 강의실로 데려간다.
100여명이 넘는 학생들 대부분이 와있고 들어가서 둘러봤지만 찾을 수가 없다.
이름을 크게 불러 호출한 후, 얻어온 솜뭉치 등을 전달하고 설명한 후 퇴장.
나와서 마눌님을 보니 전형적인 헬조선의 진상얼굴을 하고 있다.
왜 코피를 줄줄 흘리는 애를 보호자 없이 응급실로 혼자 보냈는지?
왜 솜 하나 박아놓고 10여분을 방치한 댓가를 7만원이나 내야하는지?
왜 시험보러 온 애가 시험볼 수 있게 학교가 준비를 안 하고 있는지?
당장 학교 입시관계자를 찾아서 따지고 싶어했지만, 애가 시험을 볼 수 있는지, 시험을 보고 있는지 확인해야 하고 내일도 다른 학교에서 시험이 있으니 시간 낭비일 가능성이 크고, 일단 시험장 앞에서 대기하자고 간신히 설득.
그런데 건너편 건물에서 정장의 중년남성과 박스를 든 여성이 나와서 주위에 삼삼오오 모여있는 학부모들에게 미소와 인사를 던지면서 김밥을 나눠주고 있었다.
그들이 근처로 오기 무섭게 와이프가 학교 관계자시냐고 공손히 묻는다.
그렇다는 대답을 듣자마자 와이프가 영수증을 들이대며 사정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당연히 목소리는 격앙되어 있고, 얼굴은 상기되어 있고, 나는 저 사람이 어디까지 들어줄 수 있는지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분이 답을 하기 시작하자마자 본인이 학장이라고 한다.
죄송하다.
치료비는 확인해 보겠다.
얼음팩은 구해보겠다.
시험시간에 학생에게 필요한 도움이 있으면 바로 제공하도록 감독에게 주지시키겠다.
정중한 태도로 진심이 느껴지는 대답을 했다.
그러고 나서 총총히 사라진 후 시험이 10여분 남은 상태가 되었을 때 학장이 다시 나타났다.
A4용지만한 대형 얼음팩(쓸모 없다)과 치료비취소 카드영수증을 가지고 왔고, 함께 가서 학생 상태를 확인하고 전달하자고 한다.
그렇게 했다.
이후에는 별일 없이 시험이 끝났다.
다른 점보다 안타까운 점은 전체 시험상황을 지시해야할 것 같은 책임자가 직접 나서서 말단 직원이 해도 충분한 일을 한 것이 그 학장에 대한 존경심과 고마움을 끌어내기보다는 그 학교 시스템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그렇기는 한데 그 분때문에 화가 누그러졌던 것은 사실이다.)
시험시간 내내 또 그 이후에도 저학교에만 합격하면 가도 되는 것인지 걱정스러웠다.
이 대학 이후에 5개 대학의 시험을 더 봤고, 겸사겸사 따라다녔다.
특별한 상황이 더 발생하지 않았고 다른 학교의 시스템은 어떤지 비교할 수 있는 일도 발생하지는 않았다.
질본 "건국대 집단폐렴 원인은 '방선균' 추정"…사료 취급시 '안전불감증'도 사태 키워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5/12/08/2015120801571.html
그런데 얼마 후에 그 학교에서 사건이 하나 발생했다.
애가 시험을 봤던 건물 바로 옆 건물이었고 그 건물에서는 논술시험이 치러지지는 않았던 것같다.
겉보기에 저 사건은 그 날 겪었던 황당한 상황과 전혀 상관없는 일이다.
그러나 정말 상관없는지는 모르겠다.
수능 최저가 없는 몇개 안 되는 대학이었고, 성적발표는 수능 결과가 발표되기 전에 다른 학교보다 빨리 했지만, 애는 불합격했다.
저 학교만 붙을까봐, 다른 학교는 다 떨어질까봐 걱정했었다.
지나고 보니 불합격이 참으로 잘 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