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6월 27일 월요일
한국의 과학 연구비 정책
나는 지금 전업 투자자이다.
그러나 2007년까지는 '기억과 학습'에 대해 연구하는 과학자였다.
직업을 바꾸게 된 이유 중에 하나는 내가 원하는 연구를 위해 필요한 연구비를 정상적인 방법으로 획득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인다.
정상적인 방법은 관심주제를 학교 내외의 공모과제에 지원해서 선정되는 것이고, 비정상적인 방법은 정치력이 뛰어나서 대형연구과제를 기획하거나, 과제의 일부를 담당할 능력이 되는 연구자의 팀에 속해서 내 관심사와 관련이 없는 연구에 견마지로를 다하는 것이다.
내가 속한 곳은 내부 연구비나 정착비가 없는 그저그런 학교였고, 외부 공모연구비가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곳이었다.
2000년대 초중반은 노무현 정권의 황우석을 포함한 과학정책주도자들이 관료들과 합작해서 자신들을 위한 연구비를 셀프로 만들어 독식하면서 노벨상을 위한 선택과 집중이라고 포장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대형국책과제의 비중과 규모가 커지고 있었고, 이전 정권에 비해 개별 소형과제의 비율이 줄면서 경쟁률이 매우 높아지고 있었다.
나는 4년 동안 10여차례 이상 국가 연구비를 지원했으나 모두 탈락하면서 연구에 필요한 장비와 시약 등을 여기저기서 빌리고, 얻고, 빼았고, 구걸하면서 조달했고, 월급의 일부를 털어서 부족한 비용에 보태기도 했다.
한계에 달할 즈음 불법편법 연구비 조달, 학내정치행정, 학계 줄서기 등 여러가지 생존의 방법을 고려했으나 결국 포기했다.
그런데 지금은 황우석이 설치던 10년전보다 더 소수의 연구자와 관료들에 의한 기획연구가 판치고 있고, 신진 과학자들이 기댈 수 있는 상향식 개별과제의 비중은 감소하고 있는 모양이다. 쓰레기 정치과학자들이 기획해서 가져가는 연구비가 한해 1000억이라면 이 돈으로 최소 2000-3000명의 젊은 과학자들이 연구를 포기하지 않을 수 있다. '국익'을 위해서라고 해도, '선택과 집중' 못지 않게 '학문적 다양성'도 중요하고, 이것을 지키는 것도 시간과 돈과 노력이 필요한 일이다.
내가 과학자로서 실패한 이유 전부를 한국 과학정책의 문제점으로 돌릴 수 없다. 그러나 비슷한 상황에서 한국을 떠나거나 과학을 포기한 과학자들이 존재했고, 지금도 있을 것이다. 장기적으로 한국의 미래가 전세계 어느 나라보다 과학기술, 연구개발의 질에 크게 좌우될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에 악습이 지속되고 있다면 개선되어야 한다.
아래는 최근 bric에서 이슈가 되고 있는 글이고, 전적으로 공감한다.
관련 기사에 잘 요약되어 있다.
"과학이 아니라 정치력으로 좌우되는 연구현실 개선해야"
http://news.mtn.co.kr/newscenter/news_viewer.mtn?gidx=2016062218100285385
아래는 bric의 원문이고 강조표시는 내가 한 것이다.
[오피니언] 미래부 장관님께: 과학 발전을 저해하는 국가 연구비 지원시스템의 개혁을 촉구합니다
http://www.ibric.org/myboard/read.php?Board=isori&id=19803&sflag=1&Page=1
몇 달전 알파고가 국민적 관심을 모으자 곧이어 인공지능연구에1조원 규모의 투자계획이 발표된 바 있고, 지난 5월 31일에는 앞으로 10년간 3,400억을 투자해서 초고해상도 “뇌지도”를 확보하고 인공지능과의 연계기술을 개발한다는 “뇌과학 발전전략”이 발표 되었습니다. 자살이 문제가 되었을 때 우울증 연구비가, 큰 재난이 닥친 후에 외상후증후군 연구비가 나왔었듯이, 사회적 이슈가 있을 때 거기 맞춘 연구과제가 나오는 것은 우리나라 연구자들에게는 이제 익숙한 일이 되었습니다. 언뜻 보면, 정부가 사회적 이슈나 산업적 필요에 신속하게 대응해서 그 문제 해결을 위한 연구에 투자를 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로 보일 수도 있고, 아마도 국민들에게 그렇게 보이고 싶은 욕구가 정부에서 국책 연구사업에 연구비를 점점 늘리는 이유이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대형 국책사업이 학계의 컨센서스를 얻어내지 못한 채 성급하게 발표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현재 우리나라 연구 지원의 주요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소위 “기획연구”가 우리의 연구 현장에 미치고 있는 영향과 문제점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정부가 주도하는 기획연구에서 비롯되는 문제는 개개 연구자 수준의 노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므로 정부 차원에서 학계의 의견을 수렴하여 과감한 개선책을 만들어주실 것을 바라는 마음으로 그 동안 생각했던 바를 정리하여 미래부 장관님께 건의합니다.
기획연구의 문제점을 얘기하기 앞서, 일반 과학자들이 자신의 아이디어로 개인과제 연구비를 받으려면 어떤 노력을 하고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자신의 연구 계획이 동료들로부터의 심사(peer review)를 통과해야 하므로 동료 과학자가 보기에 설득력 있고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짜내야 하고, 그러면서도 과학적 타당성과 실현 가능성이 있는 계획임을 보여 주기 위해 선행연구 결과도 있어야 하는 등, 연구 계획서를 작성하는 것 자체가 자신의 연구 주제를 연마하고 숙성시키는 과정입니다. 이렇게 최선의 노력을 하고 실패를 하더라도 그걸 평가하는 peer review 시스템이 공정하게 작동한다는 신뢰가 있으면 그 실패를 받아들일 수 있고 더 잘하기 위한 노력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연구자들 간에 선의의 경쟁이 이루어지는 연구 환경에서 연구자는 자신의 창의력을 발휘하며 자신의 연구를 발전시켜나가게 됩니다. 이런 과정으로 연구비를 지원하는 것을 상향식 (bottom-up) 이라고 하며, 진정한 학문적인 발전과 과학기술의 발달을 선도하는 창의적인 연구는 연구자 스스로가 주도하는 상향식 연구에서 나온다는 것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학계의 오랜 경험에서 나온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상향식 연구를 지원하는 연구비는 턱없이 부족하여 과제 선정률이 10%도 채 안 되는 경우가 허다한 현실은 정부의 연구비 지원 시스템이 창의적인 연구를 제대로 뒷받침하지 못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반면에 점차 그 규모가 커가고 있는 기획연구는 하향식(top-down) 연구라는 형식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연구자는 자신의 이름을 건 연구계획서가 아니라 소위 기획안을 만들어 미래부나 연구재단에 제출하는데, 기획안의 내용은 “내가 (또는 우리가) 이런 아이디어로 이런 연구를 하겠다”가 아니라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것을 개발하겠다” 입니다. 제출된 기획안의 채택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동료 과학자들의 peer review가 아니라 정부 관료이므로 기획한 사람이 설득해야 하는 대상은 과학자가 아닌 정부 관료가 되고, 결국 중요한 것은 기획안 자체의 과학적 타당성이 아니라 관료를 설득하는 정치력이 됩니다. 그리고, 기획안은 일단 채택되기만 하면 누가 어떤 과정을 통해 기획을 했는지가 공개되지 않으므로 기획하는 사람이 그 내용에 책임을 질 필요가 없는 점도 과학적 타당성이나 실현 가능성에 대한 충분한 고려 없이 정부 관료의 요구에 맞춘 기획안이 만들어지는 원인 중 하나입니다. 이런 기획과제도 일단 발표되면, 형식적으로는 과제 공모를 통한 공개 경쟁으로 선정되는 절차를 밟습니다. 하지만, 큰 틀에서의 연구 주제를 넘어 세부적인 연구 내용까지 지정해 놓은 기획안에 맞추어 연구를 할 수 있는 연구팀은 당초 기획한 연구팀 이외에 별로 없으므로 기획한 팀이 턱없이 낮은 경쟁률로 연구비를 수혜 받는 일이 대부분입니다. 간혹 다른 연구팀에서 연구비를 받는 경우도 있지만, 이미 짜놓은 틀에 맞추어 해야 하는 연구에서 연구자들이 창의력을 발휘할 가능성은 매우 적습니다. 한편, 상향식 개인과제 만으로 실험실을 꾸려가기 힘든 상황에 처한 젊은 연구자들은 자신의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현실화 하고 구현하기 위해 고민하기보다는 정치력 있는 연구자가 만들어 놓은 기획과제에 자신을 끼어 맞추려 안간힘을 쓰고 있으니, 이와 같은 상황이 지속된다면 우리나라의 과학 경쟁력은 점차 하락해 갈 것임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획과제의 문제는 기획의 과정과 연구비 선정에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기획과제에 연구비가 편중됨으로써 불가피하게 연구의 다양성이 축소되는 것도 우리나라의 과학 경쟁력을 위협하는 주요 요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노벨상 수상자를 다수 보유한 일본이 과학 강국이라는 것은 이미 주지의 사실인데, 그 비결은 놀라울 만한 연구의 다양성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어느 주제든지 관련 전문가를 찾고자 하면, 일본은 어디선가 관련 연구를 하고 있는 사람을 찾을 수 있고, 어떠한 새로운 기법이 대두되었을 때, 그 기법의 근거가 되는 최초 연구는 일본과학자의 연구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기에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는 것입니다. 반면, 우리나라 과학의 현실은 연구의 다양성이 협소하며 대세를 따라가는 fast-follower 에 머물고 있는데, 이는 과학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데에 가장 큰 장애물이며 기획과제에 편중된 현재 우리나라의 연구지원 시스템은 이를 조장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우려를 얘기하면 창의성이 중요한 기초 연구는 bottom-up 시스템으로 하고 있으니 문제 없고, 기술 개발을 목적으로 하는 국책 과제는 top-down 형식으로 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들을 합니다. 하지만 저는 창의적인 연구의 중요성은 비단 기초연구에만 해당되는 건 아니라고 확신합니다. 연구의 본질은 그게 새로운 진리를 밝히는 목적으로 하는 기초연구든, 산업화를 위한 기술 개발을 목적으로 하는 응용연구든, 공통적으로 이제까지는 없었던 새로운 걸 찾아내거나 만들어내는 데에 있습니다. 이제까지는 없었던 새로운 것, 그것을 찾아낼 수 있는 안목이 바로 창의력인데, 창의력의 높고 낮음에 개인차도 있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창의력이 발휘될 수 있도록 하는 연구 환경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의 과학 경쟁력을 강화하고자 한다면 국가 연구비 지원 시스템이 연구자들의 창의력을 극대화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투명성과 공정성이 보장되지 않는 기획과제의 운영 방식으로 인하여 연구자들간에 신뢰가 무너지고, 연구력 향상을 위한 선의의 경쟁이 실종되어 가고 있는 현재의 상황은 우리 나라의 연구 환경을 급속히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국가적 필요에 의해 연구주제와 방향을 정하는 top-down 과제가 필요하더라도, 그건 큰 틀에서의 주제를 정하는 데에 머물러야 하고, 그 큰 틀의 범위 내에서 어떤 내용의 연구를 할지는 공개적이고 자유로운 경쟁을 통해 선정되게 하여야 국책연구에서도 창의성이 발휘되고 경쟁을 통한 발전이 가능할 것입니다. 지금처럼 연구자가 정부 관료를 설득해 기획이 성사되기만 하면 그 다음은 기획한 사람이 쉽게 연구비를 받을 수 있고, 그런 연결이 없으면 실험실을 닫아야 하는 환경이 고착화된다면 연구비가 충분한 연구자는 연구자대로 자신의 창의력을 높여야 할 필요도 없을 테고, 실험실을 닫아야 하는 연구자는 창의력을 높여볼 기회도 없을 테니 우리나라 전체의 창의력 지수는 점점 낮아질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하향식 과제의 기획 시스템과 운영 방식을 대폭 바꾸지 않고는 우리나라 과학의 미래는 매우 암울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상에 설명한 바와 같은 기획 연구의 문제점은 공산주의 국가의 기획 경제에서 나타난 문제점을 생각나게 합니다. 그렇다면 문제점에 대한 해결책 또한 같은 맥락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정부가 시장에 간섭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손”에 맡긴 자유 경제가 기획 경제보다 성공적이었던 것처럼, 기획에의 유혹을 버리고 무슨 연구를 할지를 연구자에게 맡기는 상향식 시스템으로 연구비 지원구조를 대폭 조정해 주십시오. 정부 주도의 연구 기획이 꼭 필요한 경우는 자율적인 경쟁으로는 연구비를 받기 어렵지만 지속적 연구가 필요한 특수 분야에 한정하여, 무분별한 과제 기획을 통한 연구비 확보 경쟁을 멈추어 주십시오. 여기저기 큰 천막을 쳐놓고 그 아래로 연구자들이 모여들게 하지 말고, 이들을 야전에 풀어놓고 자신만이 찾을 수 있는 보물을 찾아오라 하십시오. 연구자들이 자신이 하고 싶은 연구를 자율적으로 할 수 있게 될 때 비로소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며,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을 때 최상의 성과를 낼 것입니다. 그것이 과학 강국으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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